성웅 이순신 장군의 생애와 업적
<충무공 탄신 471주년 기념 특별기고>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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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 인현동의 덕수이씨 가문에서 태어남

 

2016년 4월 28일은 성웅 이순신 장군의 탄신 471주년이 되는 아주 뜻 깊은 날이다.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은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 구국의 영웅으로 인종 1년인 1545년 4월 28일(음력 3월 8일) 한성부(漢城府) 건천동(乾川洞,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에서 이정(李貞)과 초계 변씨(草溪卞氏)와의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 충무공 이순신 영정.     © 아산톱뉴스

 

이순신 장군의 가문은 한미하지는 않았지만 현달했다고도 말하기 어려웠다. 그의 선조들은 탁월하지는 않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관직과 경력을 성취했다.

 

우선 6대조 이공진(李公晉)은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 정3품)를 지냈다. 가장 현달한 인물은 5대조 이변(李邊, 1391~1473)으로 1419년(세종 1) 증광시에서 급제한 뒤 대제학(정2품)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1품)까지 올랐다. 그는 높은 관직을 지내고 82세까지 장수했기 때문에 그런 신하들이 들어갈 수 있는 기로소(耆老所)에 소속되는 영예를 누렸고, 정정(貞靖)이라는 시호도 받았다.

 

증조부 이거(李琚)도 1480년(성종 11)에 급제한 뒤 이조정랑(정5품)과 병조참의(정3품)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비교적 순조롭고 성공적인 출세를 이어왔던 이순신의 가문은 그러나 조부 때부터 침체하기 시작했다.

 

조부 이백록(李百祿)과 아버지 이정 모두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고, 당연히 벼슬길에도 오르지 못했다. 그 주요한 까닭은 이백록이 조광조(趙光祖) 일파로 간주되어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기묘사림의 핵심 인물은 아니었지만, 기묘사림이 시행한 별과(別科)에 천거된 120명 중 한 사람이었다.

 

기묘사림에 포함되는 인물들의 명단과 간략한 전기를 담은 <기묘록 속집>에서는 “진사 이백록은 배우기를 좋아하고 검소했다”고 적었다. 이런 가문의 상황에 따라 혼인한 결과와 무관하지 않다고 판단되는데, 외조부 변수림(卞守琳)도 과거와 벼슬의 경력이 없었다.

 

이순신 장군은 태어난 서울 중구 인현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순신 장군은 어린 시절 영특하고 활달했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 때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했다.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해 어른들도 그를 꺼려해 감히 군문(軍門) 앞을 지나려고 하지 않았다.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려고 했다. 말타고 활쏘기를 잘 했으며 글씨를 잘 썼다. 그 시절에 이순신 장군은 자신의 일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뛰어난 인물을 만났다. 그는 나중에 영의정이 되는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었다.

 

서로 세 살 차이인 두 사람은 그 뒤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국난에서 조선을 구원하는데 각각 문무에서 결정적인 공로를 세웠다. 유성룡의 많은 업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순신 장군을 적극 천거하고 옹호한 행동이었는지도 모른다.

 

2. 아산으로 이주해 20세에 상주 방씨와 결혼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이순신 장군은 서울을 떠나 외가가 있는 충청남도 아산(牙山)으로 이주했다.

 

아산은 지금 그를 기리는 대표적 사당인 현충사(顯忠祠)와 묘소가 있어 그와 가장 연고가 깊은 지역으로 평가된다. 그렇게 된 까닭은 조선 중기까지도 널리 시행되던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영향 때문이었다. 남자가 결혼한 뒤 처가에서 상당 기간 거주하는 이 풍습은 자연히 부인과 그의 집안인 처가(외가)의 위상을 높였다.

 

1565년(명종 20) 이순신은 20세의 나이로 상주(尙州) 방씨(方氏)와 혼인했다. 장인은 보성(寶城)군수를 지낸 방진(方辰)이었는데, 과거 급제 기록이 없고 군수라는 관직으로 미루어 그렇게 현달한 인물은 아니었다고 판단된다.

 

이순신은 방씨와의 사이에서 이회(李薈, 1567년 출생), 이울(李蔚, 1571년 출생), 이면(李葂, 1577년 출생)의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한편 해주 오씨(海州 吳氏)와의 사이에 2남 2녀가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어릴 때부터 무인의 자질을 보였지만, 문과 응시를 준비해 왔다. 10세 전후부터 공부를 시작했다고 보면 그는 10년 정도 문학을 수업한 것인데, 무장으로는 드물게 <난중일기(亂中日記)>와 여러 유명한 시편을 남긴 뛰어난 문학적 능력을 쌓은 데는 이런 학업이 중요한 자산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혼인 1년 뒤 인생의 방향을 크게 바꾸어 본격적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앞서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려고 했다”는 유성룡의 회고는 이때의 사실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3. 31세에 식년시 무과 병과에 급제

 

선조 5년인 1572년 8월 훈련원(訓鍊院) 별과(別科)에 응시했으나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탈락하였다. 그래서 31세 때인 선조 9년인 1576년 2월에야 식년시(式年試) 무과(武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해 관직에 나섰다.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와 함경도의 동구비보(董仇非堡) 권관(權管), 발포수군(鉢浦水軍) 만호(萬戶) 등을 거쳐 건원보(乾原堡) 권관, 훈련원(訓鍊院) 참군(參軍)을 지냈다. 하지만 선조 16년인 1583년에 부친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부친상을 마치고 선조 19년인 1586년 40세 때에 사복시(司僕寺) 주부(主簿, 종6품)로 다시 관직에 나갔다. 그는 유성룡의 천거로 16일 만에 조산보(造山堡, 지금 함경북도 경흥) 만호로 특진해 다시 변방으로 나갔다.

 

1년 반 뒤인 1587년(선조 20) 8월에는 녹둔도(鹿屯島) 둔전관(屯田官)을 겸임하게 되었다. 녹둔도는 지금 두만강 하구에 있는 섬이다. 그 해 가을 여진족이 침입해 아군 11명이 전사하고 군사와 백성 160여 명이 납치되었으며, 말 15필이 약탈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순신은 경흥부사 이경록(李慶祿)과 함께 여진족을 격퇴하고 백성 60여 명을 구출했다. 그전부터 이순신은 그 지역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중앙에 병력 증강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도 승패를 가늠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지만, 궁극적인 책임은 중앙 정부에 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은 이 사건을 패전으로 간주했고 두 사람은 모두  장형(杖刑)을 당한 뒤에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하지만 명예는 곧 회복할 수 있었다. 1588년(선조 21) 1월 이일이 2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을 급습해 가옥 200여 채를 불사르고, 380여 명을 죽인 보복전에서 이순신 장군도 참전해 전공을 세움으로써 백의종군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선조 22년인 1589년 이산해(李山海)의 추천으로 다시 관직에 나서게 된 이순신 장군은 감사 이광(李洸)의 군관으로 전라도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그 해에 조방장(助防將)과 선전관(宣傳官) 등을 거쳐 정읍현감이 되었으며, 선조 24년인 1591년에는 진도군수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좌도(全羅左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로 임명되었다.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으로 부임한 이순신 장군은 전함을 건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며 왜군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 거북선의 모습.     ©아산톱뉴스

 

4. 사천해전에서 처음으로 거북선 실전 배치

 

이순신 장군은 1592년 4월 13일 일본의 침략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요청을 받아 경상도 해역으로 출정해 왜군과의 해전에서 잇따라 승리를 거두었다.

 

6월 16일(음력 5월 7일) 옥포(玉浦)와 합포(合浦)에서 왜선 30여 척을 격파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고(옥포해전), 다음날에도 적진포(赤珍浦)에서 10여척의 왜선을 격파하였다(적진포해전).

 

이 전투들에서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왜군과의 해전에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공으로 이순신 장군은 종2품 가선대부(家善大夫)로 승진했다. 7월 8일(음력 5월 29일)에는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해 사천(泗川)에서 서해로 북상하려던 왜선 13척을 모두 격침시켰다(사천해전).

 

이 전투에서는 조선 초에 등장했던 거북선을 개조해 새로 만든 거북선이 처음으로 실전에 배치되었다. 7월 10일(음력 6월 2일)에는 당포(唐浦)에서 왜선 21척을 불태웠으며(당포해전), 7월 13일(음력 6월 5일)에는 왜군이 도주해 진을 치고 있는 당항포(唐項浦)를 공격해서 왜선 26척을 격침시켰다(제1차 당항포해전). 이러한 잇따른 승리로 이순신 장군은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가 되었다.

 

이순신 장군에게 잇따라 패배한 왜군은 수군의 모든 역량을 전라도로 집결해 맞서려했다. 이순신 장군은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경상우수사 원균과 함께 8월 14일(음력 7월 8일) 견내량(見乃梁)에 집결해 있는 왜군을 한산도(閑山島)로 유인해 50여 척의 왜선을 격파하거나 나포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한산도대첩).

 

그리고 안골포(安骨浦)에서 지원하러온 왜군을 다시 물리쳤으며(안골포해전), 10월 5일(음력 9월 1일)에는 왜군의 근거지인 부산포(釜山浦)에서 왜군의 병선 100여 척을 파괴했다.

 

이러한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장악했고, 북상하던 왜군은 병력 보충과 군수품 보급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공으로 이순신 장군은 정2품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다.

 

5.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

 

이순신 장군은 1593년 8월 한산도로 본영을 옮겼으며, 9월에는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4월 23일(음력 3월 4일) 당항포에서 왜선 30여 척을 격침시켰고(제2차 당항포해전), 11월 11일(음력 9월 29일)에는 곽재우(郭再祐), 김덕령(金德齡) 등의 의병과 합세해 거제도 장문포(長門浦)에 주둔하던 왜군을 공격했다(장문포해전).

 

또한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호남지역으로 들어오는 피난민들을 돌보고, 전쟁의 장기화할 것에 대비해 둔전(屯田)을 일구고 병사들을 조련하였다.

 

6. 권율 진영에서 백의종군

 

하지만 당시 붕당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던 조정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전과를 놓고서도 논의가 분분했다.

 

특히 이순신 장군과 원균의 갈등이 문제가 되었는데, 조정은 원균을 충청 절도사(忠淸節度使)로 옮겼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은 대체로 원균의 편에 서서 여러 차례 이순신 장군을 탄핵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와 강화교섭을 하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휘하의 요시라(要時羅)라는 인물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다시 조선을 침략하러 바다를 건너오니 수군을 보내 이것을 막으라는 계책을 조정에 전달했고, 이를 믿은 조정은 도원수 권율을 통해 이순신 장군에게 수군을 이끌고 출정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왜군의 계략에 빠져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한 이순신 장군은 출정하지 않았고, 결국 그 책임으로 파직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1597년 4월 이순신 장군은 한 달 가까이 투옥된 상태에서 혹독한 문초를 받았고, 5월 16일(음력 4월 1일)에야 풀려나 권율의 진영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7. 명랑해전에서 대승 

 

그러나 이순신 장군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8월에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왜군에 대패하여 전라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최호(崔湖) 등과 함께 전사하면서 이순신 장군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남아 있는 전선을 수습하여 붕괴된 조선 수군을 재건했으며, 10월 25일(음력 9월 16일) 진도 울돌목에서 13척의 배로 130여 척의 왜군에 맞서 대승을 거두었다(명량해전).

 

이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다시 장악했으며, 왜군의 수륙병진작전(水陸竝進作戰)을 무산시켜 정유재란의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한양으로 진공하던 왜군은 보급로가 끊길 것을 우려해 충청도 직산(稷山)에서 진격을 멈추었으며, 그 뒤 전쟁은 남해안 일대의 왜성(倭城)에서 농성하는 왜군을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이 공격하는 양상으로 바뀌었다.

 

8. 1598년 노량해전에서 전사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은 선조 31년인 1598년에도 절이도(折爾島)와 고금도(古今島)에서 왜군에 승리를 거두었다.

 

왜군은 그해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철수를 준비했는데, 이순신 장군은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과 연합해 노량(露梁)에서 500여 척의 왜군과 싸워 200여 척의 적선을 불태우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노량해전).

 

하지만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은 도주하던 적선을 추격하다가 유탄에 맞아 선조 31년인 1598년 11월 19일 전사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이순신 장군이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숨이 끊어졌으며, 조카인 이완(李莞)이 그의 죽음을 숨긴 채 전투를 독려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죽음 소식을 들은 조정은 이순신 장군에게 우의정(右議政)을 추증했다. 이순신 장군은 선조 37년인 1637에는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으로 녹훈되었으며, 좌의정이 증직되었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으로 봉해졌다.

 

9. 인조 21년 ‘충무(忠武)’의 시호를 받음

 

인조 21년인 1643년에는 ‘충무(忠武)’의 시호를 받았고, 효종 10년인 1659년에는 남해의 전적지에 그의 비석이 세워졌다.

 

숙종 33년인 1707년에는 충청도 아산(牙山)에 세워진 그의 사당에 ‘현충(顯忠)’이란 호가 내려졌으며, 정조 17년인 1793년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1795년에는 문집인 <이충무공전서>가 왕명으로 간행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서울의 중심인 세종로에 동상이 세워지고 현충사가 대대적으로 정비됨으로써 이순신 장군은 한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시조 및 한시와 <난중일기(亂中日記)> 등을 남겼다. <난중일기(亂中日記)>에는 이순신 장군의 신념, 열정, 철학 즉, 효충도 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 

 

이순신 장군의 유품 가운데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는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었고,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는 유물들은 보물 제326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명나라 신종이 그에게 준 8종 15개의 유물들인 통영의 ‘충렬사팔사품(忠烈祠八賜品)’은 보물 제440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는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숭배되어 통영 충렬사(忠烈祠, 1614년 건립, 사적 제236호), 여수 충민사(麗水忠愍祠, 1601년 건립, 사적 제381호), 아산 현충사(顯忠祠, 1706년 건립, 사적 제155호) 등에 배향되었다. 그의 묘는 충청남도 아산에 있다.

 

▲ 2011년 개관한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경.     © 아산톱뉴스

 

10. 서울과 아산에서 이순신축제 개최

 

아산 순천향대학교에는 1999년 4월 이순신연구소를 창립하고 이순신 장군을 다각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2011년 4월 28일에는 현충사 내에 충무공 이순신기념관이 개관되어 그의 혼이 담긴 주요 유물 4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해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인 4월 28일을 전후하여 아산시와 서울 중구와 여수시에서는 성웅 이순신 탄신 기념 축제를 개최하여 관광객을 유치함으로써 침체된 지역경제를 활성화기키는 데에 기여하고 있다.

 

아산시의 경우 이순신 탄신 제471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제55회 아산 성웅 이순신축제 전야제 행사를 4월 27일 온양온천역 광장 및 곡교천 일원에서 개최한다.

 

오후 6시30분경 온양온천역 광장에서 곡교천 행사장까지 제등행렬 퍼레이드가 펼쳐지는데, 볼거리 충만한 공연팀들과 어우러진 17개 읍·면·동을 상징하는 제등행렬이 시민에게 참여와 볼거리를 제공한다.

 

한편 곡교천 행사장에서는 오후 6시30분부터 읍·면·동 장기자랑인 “아산 킹 선발대회”를 진행하여 아산시민들에게 즐거운 공연한마당을 제공하는데, 초청가수 “홍진영”이 출연하여 시민들과 함께하여 흥을 돋우고, 끝으로 30여 분간 불꽃놀이를 통해 축제의 분위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려 참여 시민들과 관광객들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

 

4월 28일에는 다례제를 올리고 학술세미나를 개최하여 제55회 아산 성웅 이순신축제의 의미를 더하고 개선 방안을 모색하여 아산시의 발전에 많이 기여할 것이다.

 

▲ 제46회 아상 성웅 이순신축제 퍼레이드 행사 사진.     © 아산톱뉴스

 

11. 세계 해군사상 유일하게 ‘군신(軍神)으로 평가 받음

 

성웅 이순신 장군은 수많은 역경과 난관을 치열한 고뇌와 노력으로 돌파해 역사상 유례가 없는 23전 23승의 놀랄만한 전과를 올려 한국에서는 을지문덕, 연개소문, 강감찬 등과 함께 불세출의 구국의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영국의 일본전문 역사학자인 ‘스티븐 턴불(Stephen Turnbul)’은 이순신 장군을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했다.

 

“이순신 장군은 한국의 영웅이자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해군지휘관 중 한 명이다. 이순신 해군제독의 승리들은 일본군의 패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판명됐다.”

 

1905년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 제독 전쟁영웅인 도고헤이하치로(東卿平八郞)도 이순신 장군을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했다.

 

“넬슨은 군신(軍神)이 될 수 없다. 해군 역사에서 군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이순신 장군 한 사람 뿐이다.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면 나는 일개 부사관도 못 된다.”

 

<이순신각서(李舜臣覺書)>를 저술한 후지이 노부오(藤居信雄)도 이순신 장군을 영국의 넬슨 제독과 비길만한 훌륭한 인물로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했다.

 

“나를 영국의 넬슨에게 비기는 것은 가하나 조선의 명장 이순신 장군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살신성인(殺身成仁)하여 조국을 구한 구국의 영웅으로 한국사는 물론 세계 해전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우리 후손들이 이순신 장군으로부터 본받아야 할 것으로는 충효와 애민 정신, 뛰어난 리더십과 전략전술, 타고난 문장력과 창의력, 불굴의 투지와 인내력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이순신 장군은 창의력을 발휘해 학익진과 거북선을 새로 개발했고, 전란 속에서도 틈틈이 일기를 써 명저인 <난중일기(亂中日記)>을 남겼으며, 억울하게 모함을 당하여 옥고를 치르고서도 백의종군하여 나라를 지키는 군인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 한국 국민들의 중요한 타자(significant others)로 우뚝 솟았다.        

 

<참고문헌>

1. 김태훈, <이순신의 두 얼굴>, 창해, 2004.

2. 이민웅, <이순신 평전(420년 만에 다시 본 이순신과 임진왜란)>, 책문, 2012.11.10.

3. “이순신(李舜臣)”, 네이버 두산백과사전, 2016.4.22.

4. “자신과 나라의 역경을 극복한 명장 이순신”, 네이버케스트, 2016.4.23.

5. 장영주, “효충도를 완성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태극할배가 들려주는 한민족역사문화공원 이야기”, 브레인미디어, 2015.12.24일자.   

6. 박성규, “올 ‘아산 성웅 이순신축제’ 당일 행사로 치러진다 - 4월27일에는 탄신전야 축하쇼, 28일엔 다례제와 학술세미나 진행”, 아산톱뉴스, 2016.3.8일자. 

7. 이기환, “세계7대 군함 거북선”, 경향신문, 2016.4.11일자.

8. 이준철, “서울 중구, 충무공 탄신 기념 축제 개최 - 26일 거북선 대축제, 28일 한옥마을서 기념 다례”, 신아일보, 2016.4.21일자.

 

 

<필자 소개>

 

▲ 신상구.     © 아산톱뉴스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문학평론가)

 

-출생: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학력: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경력: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아우내 단오축제>, <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 <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4권. 

 

-주요 논문: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체의 현황과 과제”, “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 등 67편.

 

-수상 실적: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시부문 신인작품상, <한비문학>·<오늘의문학> 평론부문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활동: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기사입력: 2016/04/26 [19:48]  최종편집: ⓒ 아산톱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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