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토정 이지함의 생애와 업적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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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식보다는 지혜가 더 필요한 세상

 

내가 29세에 결혼해 아내와 가정을 이루고 살은 지가 어느덧 40년이 다 되어 가니 새삼 세월이 빠르고 무상함을 느끼게 된다.

 

나의 아내 장금순(張金淳·63)은 한남대 지역개발대학원 부동산학과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은 지식인이다. 그런데도 연말 연초가 되면 무속학으로 국학박사학위를 받은 남편인 나에게 유명한 무당을 소개해 달라고 애원하듯이 매달린다.

 

평일에도 매일 운세가 좋은 날과 나쁜 날을 알아보기 위해 <토정비결>을 본다. 운세가 나쁜 날은 외출을 하지 않고 생필품도 구입하지 않는다. 남편도 자식도 운세가 나쁜 날은 외출을 자제하라고 경고한다. 나는 아내에게 <토정비결>은 미신이니 믿지 말고, 매사를 조심하면서 신중하게 처리하면, 아무 탈이 없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아내는 남편 말보다 <토정비결>을 더 신봉한 나머지 매일 정독하고 일상생활에 활용한다.

 

▲     © 아산톱뉴스

 

나의 친척도. 친구도, 박사학위논문 지도교수도, 예술가도, 정치인도 나에게 유명한 무당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여러 번 있다. 

 

나의 아내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연초가 되면 습관적으로 <토정비결>을 보거나 점집을 찾는 풍습이 있다. 그래서 무속을 전문적으로 조사 연구하는 민속학자인 나도 연초에는 무속인들을 만나 채록을 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하여 나는 새해 운세를 궁금해 하는 민초들을 위해 최근 몇 년간 연초가 되면 일간 신문이나 주간신문에 새해 운세를 전망하는 칼럼을 기고한다.

 

2016년 병신년 새해에도 내가 기고한 ‘병신년 새해의 민속학적 의미와 운세’란 칼럼이 일간신문인 중앙매일, 중부매일, 중도일보 등에 게재되어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다.

 

일간 신문을 구독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네이버, 다음, 구글, 네이트 등 인터넷의 ‘밝달나무’ 자유게시판, ‘상생방송’ 자유게시판, ‘증산도’ 자유게시판, ‘환단고기’ 자유게시판에도 칼럼을 게재해 놓아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보고 있다. 영광스럽게도 어떤 유명한 역술가는 내 칼럼을 통째로 복사해 무업에 활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어느 누가 나에게 유명한 무당을 소개해 달라고 해도 절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중개인이 아니고 순수학문을 연구하는 민속학자로서 자존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래는 변수가 많아 어느 누구도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미래학자도, 주역학자도, 무당도 연 초나 세기 초가 되면 나름대로 미래를 전망하는 말을 하고 글을 쓰지만 이제까지 정확하게 미래를 예측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미래는 신(神)도 모른다”고 푸념하듯이 말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연초가 되면 어리석게도 점집을 찾아 비싼 복채를 내고 점을 치곤한다.

 

올 4월에는 국회의원 선거가 있어, 점집을 찾은 정치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최근 정치 9단인 김종필(金鍾泌·90) 총리가 “정치는 허업(虛業)이다”라고 말했는데, 지금도 정치를 하기 위해 새로 입문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현명한 것 같으면서도 어리석다. 우리가 부러워하고 존경하는 교수, 판사, 변호사, 의사, 국회의원, 장관, 국무총리, 대통령 등 수많은 지식인 엘리트들이 헛된 돈과 명예와 권력욕에 사로 잡혀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바람에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 가문에 먹칠을 하고 민족반역자로 비판을 받는 불행한 인재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21세기를 살아가는 현자들은 지식보다는 지혜가 더 필요해 지식교육보다는 인성교육과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토정 이지함은 모범적으로 인생을 살아 존경을 받고 있는 역사적 인물로 우리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많은 지혜와 교훈을 안겨주고 있어 특별히 소개하고자 한다.

 

2. 토정 이지함의 생애와 업적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은 1517년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 토정마을에서 부친인 현령 이치(李穉)와 모친인 광산김씨(光山金氏) 사이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형백(馨伯)·형중(馨仲), 호는 수산(水山)·토정(土亭)이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     © 아산톱뉴스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 6대 손으로, 북인의 영수 이산해(李山海, 1539∼1609)의 숙부이다. 아버지 이치(李穉, 1477∼1530)는 1504년에 일어난 갑자사화에 종조부(從祖父) 이파가 연루되어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 때 석방되었고, 1507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의금부 도사와 수원 판관 등을 지냈다.

 

어머니 광산김씨는 판관을 지낸 김맹권(金孟權)의 딸이다. 김맹권은 집현전 학사로 세종의 신임을 받아 단종의 보필을 부탁받았으나 1455년 수양대군이 집권하고 단종이 죽게 되자 보령으로 낙향하여 여생을 은거한 인물이다.

 

생애의 대부분을 마포 강변(현 마포 용강동 부근)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淸貧)하게 지내 토정이라는 호가 붙었다.

 

14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이지번(李之蕃)에게서 글을 배웠고, 16세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이후 형 지번을 따라 서울로 거처를 옮겼으며 형의 보살핌을 받았다. 후일 이지함은 지번의 아들인 산해에게 글을 가르쳤는데, 산해가 태어났을 때 집안을 일으킬 인물이 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20대 초반에는 왕가의 후예인 이정랑(李呈琅)의 딸과 혼인하여 산두(山斗)·산휘(山輝)·산룡(山龍)과 서자인 산겸(山謙) 등 네 아들을 두었는데, 산휘는 호랑이에게 물려 죽고 산룡은 역질에 걸려 죽었다. 산겸은 장성하여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싸웠으나 역모죄를 받게 되었다. 장인 이정랑은 윤원형이 꾸민 양재역 벽서사건에 휘말려 태형을 받고 능지처사되고 말았다.

 

토정 이지함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의 문하에서 동인(東人)의 영수가 된 허균의 아버지 초당(草堂) 허엽(許曄, 1517∼1580 ), 서인(西人)으로 영의정에 오른 사암(思庵) 박순(朴淳, 1523∼1589), 선조 재위 시에 영의정을 역임한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 등과 함께 공부하여 경사자전(經史子傳)에 통달하였고, 스승의 영향을 받아 역학·의학·수학·천문·지리에도 해박하였으며, 점술과 풍수까지 정통했다.

 

선조 6년인 1573년 6월, 57세의 이지함은 조목(趙穆)·정인홍(鄭仁弘)·최영경(崔永慶)·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숨은 현자라는 ‘탁행지사(卓行之士: 행실이 아주 뛰어난 선비)’로 천거되는 바람에 1574년 6품직을 제수받아 포천 현감이 되었다.

 

그런데 그가 포천 현감으로 부임하자마자 올린 혁신적인 상소가 완고한 유교 이념주의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듬해인 1574년 8월 사직했다. 토정 이지함의 사회경제사상은 포천 현감을 사직하는 상소문 등에 피력되어 있는데, 농업과 상업의 상호 보완관계를 강조하고 광산 개발론과 해외 통상론을 주장하는 진보적인 것이었다.

 

62세 때인 1578년에 아산현감으로 있던 윤춘수(尹春壽, 1521∼?)가 백성들에게 온갖 행패를 부려 원성이 높아지자 토정 이지함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아산현감으로 부임했다. 그는 부임 직후 곧바로 사회복지시설인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관내 걸인의 수용과 노약자의 구호에 힘쓰고, 현안이었던 군역 문제를 해결하는 제안을 했다.

 

토정 이지함은 사암(思庵) 박순(朴淳, 1523∼1589)·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 등과 교유했고, 당대의 일사(逸士)인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은 마포로 그를 찾아와 그를 중국 동진 시대의 시인 도연명(陶淵明, 365∼427)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토정비결(土亭祕訣)>은 이지함이 의학과 복서에 밝다는 소문이 퍼져 사람들이 찾아와 1년의 신수를 보아 달라는 요구로 지은 책으로, 이지함과는 관계없이 그의 이름을 가탁한 책이라는 주장이 우세하다.

 

이지함은 주자 성리학만을 고집하지 않는 사상적 개방성을 보였으며, 이러한 까닭으로 1666년 조선 현종 때 홍만종(洪萬宗, 1643∼1725)이 도가적 행적을 보인 조선의 인물들을 기록한<해동이적(海東異蹟)>에도 소개되어 있다.

 

또한 이지함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황강(黃崗) 김계휘(金繼輝, 1526∼1582)의 질문에 이이가 ‘진기한 새, 괴이한 돌, 이상한 풀’이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이지함의 기인적 풍모를 대변해 주고 있다.

 

토정 이지함의 풍모를 전해주는 기록이 <혹인기사>라는 책에 나온다.

 

‘선생은 키가 보통사람보다 훨씬 컸고 골격도 건장했다. 또 얼굴이 검으면서도 둥글고 살집이 좋았다. 발 길이는 한 자가 거의 다 되었으며, 목소리 또한 맑고 우렁찼다. 말수가 적었으며 기개가 당당했고 위풍이 늠름했다’.

 

이 책은 또, 토정이 늘 저자와 산수 간을 돌아다니다가 잠이 오면 두 손으로 지팡이에 의지해 허리를 구부리고 머리를 숙인 채 잠이 드는데, 코고는 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소나 말도 놀라 도망치기 일쑤였다고 전한다.

 

토정 이지함은 젊어서부터 욕심이 없고 인색함을 몰랐다. 기질을 이상하게 타고나 추위·더위·주림·갈증을 잘 참았다. 어떤 때는 알몸으로 거센 바람을 맞았고, 또는 열흘을 음식 한 번 먹지 않아도 병들지 않았다. 천성이 효성과 우애가 깊었고 재물을 가볍게 여겨 남의 급한 사정을 잘 도왔다. 명령을 내리는 것은 모두 백성을 사랑하기를 위주로 하니 백성 모두가 그를 흠모했다. 

 

토정 이지함은 남루를 걸치고 삿갓 쓰고 죽장 짚고 팔도강산을 두루 돌아다녔다. 관례(冠禮) 이후 수십 년간 쓰고 다니던 갓이 망가져버리자 낡을 대로 낡아버린 밥솥까지 구멍을 뚫어 ‘쇠갓’을 만들어 쓰고 다녔다. 그런 초라한 차림새로 주유하면서 당대의 내로라하는 고관대작과 명사들을 만나는데 조금도 거리낌 없었다.

 

이처럼 토정은 청빈무욕하게 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무능하고 무기력한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사농공상이라고 하여 상인이 가장 천대받던 시대에 그는 이미 상업과 경제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고, 본보기삼아 사업수완을 발휘하여 떼돈을 번적도 있었다.

 

언젠가 그는 조각배를 타고 무인도에 들어가 박을 심어서 수만 개의 바가지를 만들어 팔아 수천 석의 곡식을 사서 빈민들을 구제하기도 했다. 하지만 집에는 쌀 한 됫박 들여놓지 않으니 부인이 바가지를 긁을 수밖에 없었다.

 

토정 이지함이 나라 곳곳을 방랑하며 다니던 젊은 시절에는 방문지의 수령들이 그를 시험해보고자 뛰어난 기생을 시켜 온갖 수단으로 유혹하게 했지만, 색욕까지도 이겨냈다. 바다에서 배를 타는 것을 좋아해 제주도에 자주 갔지만, 바람과 조수의 흐름을 미리 알았기에 한 번도 위험에 빠지지 않았다.

 

토정 이지함은 풍류거사였을 뿐만 아니라 앞날을 미리 내다볼 줄 안 도통한 예언가이기도 했다.

 

그는 서산대사·이율곡·이순신과 등과 더불어 임진왜란을 예측한 몇 사람 가운데 하나였고, 수제자인 의병장 조헌(趙憲, 1544∼1592)이 금산전투에서 전사할 것을 예언했다.

 

그는 또 사람의 안색과 음성만으로도 그의 길흉화복을 미리 알았다고 한다.

 

토정은 또한 풍류객답게 음률에도 정통했고 특히 거문고를 잘 탔는데 그의 둘째 아들 산휘(山輝) 역시 지음(知音)의 기재(奇才)였다고 전한다.

 

▲     © 아산톱뉴스

 

토정 이지함은 아산 현감 시절 갑자기 이질을 앓아 1578년 음력 7월17일 6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수많은 고을 백성이 길을 메우고 마치 부모상을 당한 듯 애통해 했다.

 

토정 이지함의 묘소는 서해의 낙조가 내려다보이는 충남 보령시 주포면 고정리 국수봉 기슭에 있다. 이지함의 묘소는 도학과 풍수에 정통했다는 선생의 묘답게 서해가 훤히 내려다보이고 하루 종일 햇살이 밝아 명당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1713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충청남도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과 보령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     © 아산톱뉴스

 

충남 아산시 영인면은 토정이 아산현감으로 재직할 당시 아산현 관아 소재지였다. 영인면사무소 앞뜰에는 1997년 12월23일에 세운 토정 이지함의 동상이 있고, 그 뒤쪽에는 토정의 선정을 기리는 영모비가 있다. 또 영인초등학교 입구에는 토정 당시 아산현 관아 정문이었던 여민루가, 여민루에서 마을 안으로 조금 들어가면 토정이 이전한 아산향교가 있다.

 

하지만 토정이 구세제민의 경륜을 펼치던 걸인청 건물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남아 있었으나 시골까지 불어닥친 개발 바람에 밀려 사라져버려 이제는 영영 찾아볼 길이 없다.

 

토정 이지함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 사결(士潔) 정렴(鄭렴, 1506∼1549)과 함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기인(奇人) 혹은 방외지사(方外之士)였다. 그리고 그는 경세가였고, 우리나라 최초의 경제학자였고, 사회복지의 선구자였다.

 

토정 이지함이 포천에 부임했을 때 올린 상소(莅抱川時上疏·이포천시상소)는 조선 최초의 ‘국부론(國富論)’이라 할 만하다. 이는 세계 최초의 근대 경제학 저술로 일컫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90)의 <국가의 부(富)의 본질과 원천에 대한 탐구>, 즉 ‘국부론’보다 200여 년이나 앞서 나온 탁견이다.

 

아산 현감으로 부임하자마자 설립한 빈민구호시설 ‘걸인청(乞人廳)’도 1884년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설립되었다는 사회복지관 ‘토인비홀(Toynbee Hall)’보다 300년을 앞선 것이다. 문집으로는 <토정유고(土亭遺稿)>가 전한다.

 

토정 이지함은 양반의 나라, 선비의 나라 조선에서 보통의 양반이나 선비와는 크게 다른 인생 역정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그는 보통의 양반이나 선비와는 달리 새 도포를 거지 아이에게 벗어준 자비로운 인물, 성리학은 물론이고 다양한 분야의 책까지도 섭렵할 만큼 왕성한 호기심과 지식욕이 강했던 탐구인, 조선의 모든 양반이 꿈꾼 과거 급제를 천하게 여겼던 선비, 처가의 재앙을 미리 예측한 예언가, 수양을 강조하는 선비와 도를 닦는 스님도 어렵다는 색욕까지 극복한 절제력의 소유자, 대륙 지향적인 조선 사회에서 바다를 제 집처럼 여기며 누구도 가기 싫어했던 제주도를 세 번이나 왕래했던 바다 사람,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차별과 상업을 천시했던 조선에서 큰돈을 벌었던 상인, 제방을 쌓아 바다를 막으려 했던 토건인, 포천과 아산을 다스렸던 행정가 등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그 자신의 신분이 양반이자 선비였던 토정 이지함이 조선에서 가장 천하게 여기던 말업(末業)과 바다에서 배 타기를 즐겼다는 것은 그를 시대의 이단아로 평가하기에 전혀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장사꾼 이지함’, ‘경세가이며 경제학자인 이지함’의 탄생은 알 수 없는 운명의 가혹한 시련 때문이기도 했고, 천성적으로 자유분방한 성격 때문이기도 했다,

 

3. 토정 이지함의 국부론과 생산적 복지론

 

조선 최초의 경제학자인 토정 이지함이 1574년 6품직을 제수받고 포천 현감으로 부임할 때 올린 상소문은 조선 최초의 국부론이자 생산적 사회복지론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90)의 ‘국부론’보다 200여 년이나 앞서 나온 탁견이다.

 

토정 이지함은 전국 방방곡곡을 유랑하며 자신의 눈으로, 몸으로, 마음으로 백성들의 삶과 함께 했다. 육지 사람들은 감히 상상도 못하고, 가보려도 하지 않았던 저 머나먼 유배의 땅 제주도를 왕래하기도 했다. 양반과 선비라는 허장성세로 뒤덮인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그 시대에 가장 천한 업인 소금을 굽고, 물고기를 잡고, 섬에서 박을 키워 바가지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노동자와 장사꾼의 삶을 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당대의 석학이었던 율곡 이이, 남명 조식 등과 교류하면서 학문을 닦아 언젠가 다가올 경륜을 펼 시간을 준비해갔다.

 

모진 체험과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았기에 훗날 그가 “서산과 태안의 염전을 잘 경영하면 능히 국가 재정 비용을 댈 수 있다”라며 재정 빈곤의 해법을 제시할 수 있었다.

 

또한 이지함 졸기의 기록처럼 자신은 가난한 백성을 부자로 만들고, 어지러운 정치를 다스릴 수 있다고 호언장담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토정 이지함은 탁상공론에 가까운 선비의 삶, 머리로만 지혜를 추구하는 선비의 삶 대신에 삶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고뇌하고,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또한 불쌍한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헌신한 비즈니스맨이었다.  

 

토정 이지함의 경세사상은 포천 상소문에 가장 잘 드러난다. 당시 포천은 조선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꼽혔다.

 

이지함은 가난한 포천을 구제하기 위해 당시의 일반적인 빈곤 구제 방법인, 서울에 비축된 곡식을 빌려와 해결하는 방식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 대신에 이지함은 ‘자립’만이 해법이라며, 그 당시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혁신적인 방안인 3대 창고 개발론을 제안했다.

 

3대 창고의 첫째는 ‘도덕창고(道德之府庫)’, 둘째는 ‘인재창고(人材之府庫)’, 셋째는 재화의 창고를 말하는 ‘백용창고(百用之府庫)’다.

 

도덕창고론은 위로는 임금부터 아래로는 백성까지 모두가 사치와 사욕을 절제하고, 마음의 창고를 열어 아낌없이 나누자는 정신개혁론이다.

 

인재창고론은 인재를 발굴하고, 활용해 난국을 해결하는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주장이다. 그는 나라가 서 있는 한 인재 또한 반드시 있게 마련이라면서 재능에 따른 인재 배치를 강조했다.  

 

백용창고론은 육지와 바다의 다양한 자원을 아끼지 말고 적극적으로 개발하자는 주장이다.

 

‘3대 창고 개발론’은 이지함의 시대는 물론이고 오늘날, 또한 미래에도 어떤 나라나 어떤 리더에게도 유효하고 변하지 않을 민생구제를 위한 진리다.

 

그런데 상소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는 이상적이고 장시간을 요하는 도덕창고론과 인재창고론보다 백용창고론의 현실성과 즉시성을 더 주목했다. 백용창고 개발론은 이지함 국부론의 핵심으로, 북학파보다 200년이나 앞선 선구적 주장이다. 백용창고 개발론은 새로운 조선을 만들 수 있었던 가장 혁신적인 방안이었다.

 

역사에서 가정법은 의미가 없다지만, 만약 토정 이지함의 ‘백용창고 개발론’이 구현되었다면, 아마도 조선은 영국보다 먼저 산업화와 근대화를 이룬 나라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포천 상소에서는 크게 광산 개발, 어업 및 염업 규제 해제로 나타난다. 광산 개발에 대해 “은(銀)을 주조할 수도 있고, 옥(玉)을 캘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산업은 모두 사리사욕을 꾀해 이익을 즐기고 재물을 탐하고 인색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래서 비록 소인배들이나 좋아하는 것이고, 군자는 하찮게 여기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마땅히 취할 것은 취해 백성들의 목숨을 구제하는 일은 성인의 권도(權道)”라면서 당연히 해야 할 산업이라고 했다.

 

이 주장은 조선의 사상적 근본인 선비들의 정신중심주의,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농본주의와는 그 발상이 다른 혁신적 사고였다.

 

토정 이지함은 백성을 위해 조정에서 금지한 광업과 어업, 염업의 허용을 주장했다. 그런데 이지함이 단순히 원론적 의미의 광산개발만 건의했다면, 그의 주장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지함은 탁상공론이 아니라 구체적 실천방법까지 제시했다.

 

“이러한 광물이 나는 곳을 수소문해 은광이 있으면 은을 채굴하게 하고, 옥광이 있으면 옥을 캐어서 쓸 수 있도록” 해달라며 기존의 광산을 활용하는 현실적 접근을 꾀했다.

 

게다가 “만약 공력에 비해 소득이 적다면 버려두고 하지 않을 것”이라며 사업성을 바탕으로 시작하자고 했다.

 

그의 식견은 더 나아가 투입 대비 효과가 큰 경우에는 “그 사업의 전말을 낱낱이 적어 위에 아뢸 것”이라며 투명성까지 전제하고 있다.

 

그의 광산개발론은 비즈니스적 관점은 물론 현대적의 의미에서의 투명경영론까지도 엿보인다. 바다가 없는 포천에 바다를 만들어주는 발상인 어업과 염업 활용 방법도 아주 구체적이다.

 

어업을 위해서 전라도 만경현 양초도(洋草島)를, 염업을 위해 염전이 있는 황해도 풍천부 초도(椒島)를 포천에 귀속시켜달라고 했다. 서울의 고관들은 듣지도 못했을 특정 섬의 명칭을 거론한 것이다. 어업과 염업으로 고기를 잡고 소금을 구워 판다면 2∼3년 내에 수천 석의 곡식을 확보하고, 가난 구제는 물론 포천이 부유하게 될 수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지함의 규제 개혁을 통한 광업과 어업, 염업 허용은 부의 축적을 통한 민생 개선이며, 국부의 총량을 증진시키는 방법이었다.

 

그러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포천이 일단 살아나고 나면 양초도의 어업권과 초도의 염업권을 다른 가난한 고을에 주어 그 고을 역시 포천현에서 했던 것처럼 운영하게 하면, 은혜를 널리 베풀어 생명을 구제하는 데 한몫을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라며 부의 확산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지함의 재화창고 개발론을 현대적으로 다시 해석해 보면, 공업과 상업의 자유화, 규제개혁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 생산적 복지론과도 같다.

 

다른 한편으로는 1980년대 중국 등소평(鄧小平, 1904∼1997)이 국가 발전의 방법으로 제기했던 선부론(先富論), 즉 특정지역을 먼저 발전시키면, 그 영향으로 다른 지역도 함께 발전하게 된다는 논리와 똑같다.  

 

조선은 철저한 유교 중심의 신분사회였고, 공업과 상업은 천시했다. 선비들의 불문율은 “군자는 의리만 말하고, 이익은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지함은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에 대해 “참으로 잔인한 사람”이라고 비판했고, 심지어 이지함은 자신의 제안을 저지하는 사람에 대해서 “반드시 하늘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까지 단호하게 주장했다.  

 

이지함의 혁신적인 경세론은 지금도 유효하다. 발상을 바꾸는 것, 자신만의 밥그릇을 기준으로 사회의 규칙을 정하는 것은 공동체를 피폐하게 하고 불행하게 만든다.

 

이제는 시련 속에서도 세상 사람들과 함께 같은 꿈을 꾸며 자신을 갈고 닦아 풍요로운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토정 이지함의 경세론을 온고지신(溫故知新)으로 삼아 장기 침체의 늪에 빠져 허덕이는 한국경제를 다시 활성화하여 국민소득을 증대하고 조세제도의 개혁으로 소득 양극화를 해소하는가 하면 국민복지제도를 확충하여 국민 모두가 골고루 잘 사는 복지국가(welfare nation)를 지향해야 할 때이다.

 

4. <토정비결(土亭祕訣)>의 저자 논쟁

 

대부분의 사람들이 연초에 그 해의 운세를 점쳐보기 위한 교과서로 널리 알려진 <토정비결(土亭祕訣)>의 저자는 토정 이지함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최근 <토정비결(土亭祕訣)>이 이지함의 학문적 역량에 비해 낮아 <토정비결(土亭祕訣)>의 저자가 이지함이 아니고, 이지함의 이름을 가탁한(빌린) 저작 쪽으로 무게가 쏠리고 있다.

 

특히 <이지함 평전>의 저자인 건국대학교 사학과 신병주(53) 교수는 여러 가지 이유로 ‘누군가가 토정의 이름을 빌려서 썼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이지함의 생몰연대는 16세기(1517∼1578)인데, <토정비결>이 널리 퍼진 것은 19세기 후반부터이다. 실제로 19세기 이후 주역, 점술, 관상비기에 능했던 이지함의 행적이 민중들에게 널리 전파됐고, 후대에 비결류의 책인 <토정비결>이 만들어지면서 저자로 내세운 것일 수 있다는 게 신 교수의 추정이다.

 

신병주 교수는 “<토정비결>에 대해서는 이지함의 저작이라는 설과 그의 이름을 후대에 가탁한 것이라는 주장이 함께 제기되고 있다”면서도 “숙종 때 그의 후손인 이정익(李禎翊)이 이지함의 유고를 모은 문집인 <토정유고>를 간행할 때 <토정비결>이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현재 유행하고 있는 <토정비결>이 이지함의 저작일 가능성은 떨어진다”고 설명했다.

 

이어 신 교수는 “<토정비결>이 이지함 사망 직후에 유행한 것이 아니라 300여 년 뒤인 19세기 후반에 널리 퍼진 점을 고려할 때 이지함의 이름을 가탁한 것이라는 주장에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면서도 “다만 <토정비결>이 <주역>과 체제가 유사하며 이지함이 비기에 능했음을 감안할 때 토정의 사상과 <토정비결>이 완전히 별개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토정비결>의 저자문제를 놓고 이지함의 작품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주장이 잇따라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만, 이지함이 역학과 천문에 밝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이 한 해의 운세를 살펴달라고 요청해 저술했다는 설이 현재 지배적으로 유통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론 이지함이 자녀의 사주가 신통치 않게 나오자 내놓은 결과물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지함이 자녀의 사주를 풀어본 결과 벼슬이나 장사를 해볼 만한 재간도 없는 것으로 나왔고, 사주팔자를 해석할 만한 능력도 없었다. 이에 자신의 능력을 전수해주기 위해 사주팔자 보는 법을 간추려서 토정비결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5. 지방자치단체에서 앞을 다퉈 토정 이지함 문화콘텐츠 개발

 

토정 이지암은 선견지명(先見之明)을 겸비한 예언가로, 경제학자로, 사회복지 선구자, 지방행정가로 잘 알려져 있는 기인이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 그와 관련이 있는 각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그의 업적과 문화적 가치를 계승·전파하기 위해 다양한 축제를 열고 있고, 주민소득과 연계할 수 있는 각종 프로그램을 앞을 다퉈 개발하고 있다.

 

서울 마포구는 토정선생이 머물던 곳으로 추정되는 토정(土亭)이 위치해 있던 곳에 토정동 이라는 행정 동을 지정, 그의 뜻을 기리는 한편 2015년 9월17일에는 토정로에서 토정 이지함 선생 동상 제막식을 가진 바 있으며, 용강동 350여 개의 점포를 대상으로 토정 이지함을 테마로 한 특화거리를 조성했다. 매년 5월 개최하는 토정 백일장대회는 그를 마포의 인물로 자원화 하는데 밑거름이 되고 있다.

 

여기에 마포구는 구청과 구의회를 비롯해 문화원이 함께 토정기념관을 건립하고 더 많은 토정 이지함의 조형물을 세워 스토리텔링조성 사업과 토정공원을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     © 아산톱뉴스

 

충남 아산시도 토정 선생을 아산을 빛낸 인물로 인산서원(仁山書院)에 배향했으며, 마포구와 함께 토정 이지함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 선생에 대한 연구를 본격화한다는 방침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충남도의회는 지난 3월10일 아산청소년교육문화센터에서 지역민과 관련 전문가를 초청, ‘토정 이지함과 걸인청의 역사 문화적 가치와 활용을 골자로 한 의정토론회를 개최하고 직업체험관 운영 등 걸인청 복원의 설립 방향을 제시했으며, 이지함이 목민관으로 재임했던 아산을 널리 홍보한다는 계획이다.

 

▲     © 아산톱뉴스

 

경기도 포천시도 이지함 선생이 포천의 목민관으로 있을 때 지방자치제의 미래를 엿본 비결의 상소문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미래의 귀중한 문화자원이 될 것이라는 게 포천시의 입장이다.

 

그런데 요즈음 MBC-TV에서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에 주말 인기드라마 <옥중화>를 방영하고 있는데, 극중 인물로 토정 이지함이 등장하고 있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리고 충남 보령에 '토정비결 체험관'이 건립될 예정이어서 역시 언론의 조명을 받고 있다.

 

실제로 보령시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충청지역 유교문화자원을 활용한 대한민국 대표문화 관광권 도약과 지속가능한 지역관광발전을 위해 추진하는 ‘충청유교문화권 광역관광개발’사업으로 ‘토정비결 체험관’ 건립사업이 최종 확정됐다고 2016년 9월12일 밝혔다. 

 

충청유교문화권 광역관광개발사업은 대전, 세종, 충남, 충북 등 충청권 4개 시·도에 내년부터 2026년까지 10년 간 34개 개발사업, 13개 진흥사업 등 모두 47개 사업에 7953억 원이 투입되는 대규모 사업이다.

 

이 중 보령시는 국비 95억2500만 원을 확보 모두 198억5000만 원을 투자해 청라면 장산리 토정마을에 토정비결 체험관을 건립할 계획이다.

 

보령시는 내년에 기본계획수립 및 타당성 조사, 지방재정투융자심사(중앙)를 마치고 2018년에는 실시설계, 편입토지매입 등 사전절차의 선제적으로 추진 사업기간을 단축 2021년까지 사업을 모두 완료한다는 방침이다.

 

토정비결 체험관 면적은 약 1만1543㎡에 달하고, 내부에 토정기념관과 토정비결 운세 체험관, 걸인청 및 거처 등 재현시설을 갖출 계획이다.

 

보령시는 이밖에도 관광객 편의를 고려한 친환경 공원을 조성하고 토정비결 축제, 국제 운명학 대회, 드라마 및 영화 촬영장소 제공 등을 통해 공동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서울 마포와 경기 포천, 충남 아산과 연계한 광역 관광루트개발 등을 통해 보령시를 세계 인문학의 중심지로 발전시킨다는 복안이다. 

 

토정비결 체험관의 모티브 인물인 토정(土亭) 이지함 선생은 걸인청을 만들어 인본과 애민을 실천한 사회복지의 선구자이자 시대를 앞서 간 개혁적 실용유학자로 새롭게 조명 받고 있다.

 

특히 흙담 움막집(土亭)에 거주하면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다 간 청백리의 진정한 표상으로 추앙받고 있음은 물론, 천문, 지리, 의학, 역학, 수학에 능통하고 도참서인 토정비결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

 

1. 신상구,『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대천시개발위원회, 1994.

2. 신병주,『이지함 평전』(은둔과 변혁의 변증법적 실천가),  글항아리, 2008.12.19.

3. 이태복,『조선의 슈퍼스타, 토정 이지함』, 동녘출판사, 2011.

4. 신상구,「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박사학위논문, 2011.8.

5. “이지함(李之菡)”, 네이버 두산백과, 2016.2.8.

6. 禁東根, “『토정비결』이지함 작품 아니다”, 동아일보, 1997.1.7일자. 17면.

7. 황원갑, “토정 이지함 '주유천하'하며 명사들과 교유, 쇠갓 쓰고도 당당했던 '기인이재' 풍류의 향기⑮ 토정 이지함(下)”, 데일리 한국, 2006.5.16.

8. 조정진, “'명당 중의 명당' 토정 이지함 묘소”, 세계일보, 2012.3.1일자.

9. 권순재, “토정비결, 토정 이지함이 저자 아니다? 19세기 후반부터 유행 이지함은 16세기 인물 "이름빌린 저작" 설득력”, 금강일보, 2013.3.19일자. 1면. 

10. 박종평, “선비, 왕도를 말하다 - 토정비결의 주인공? 이지함 ‘국부론’의 재발견”, 중앙일보 201401호, 2013.12.17일자.  

11. 정상원․송은미, “역시… '정치 9단' JP”, 한국일보. 2015.2.24일자. 3면.

12. 박종일, “마포구 용강동에 토정 이지함 테마거리 조성”, 2015.9.16일자.  1

13. 편상범, “한국의 기인 토정 이지함선생을 지역의 역사인물로 각기 주장”, 보령인터넷뉴스. 2015.10.19일자.  

14. 최의성, “이지함 선생 '청백리·실용주의' 재조명”, 대전일보, 2016.9.13일자. 12면.

 

 

<필자 소개>

 

 

▲ 신상구 박사.     ©아산톱뉴스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문학평론가)

 

-출생: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학력: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경력: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아우내 단오축제>, <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 <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4권. 

 

-주요 논문: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체의 현황과 과제”, “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 등 67편.

 

-수상 실적: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시부문 신인작품상, <한비문학>·<오늘의문학> 평론부문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활동: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기사입력: 2016/11/04 [17:55]  최종편집: ⓒ 아산톱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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