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아우내 장터 항일 독립선언서의 역사적 의의와 창조적 계승 방안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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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요즈음 우리나라에서는 국가 정책적 차원에서 또는 민간운동 차원에서 민족사 바로 세우기 운동과 과거사 진상규명 작업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최근까지 베일(veil)에 싸여있던 많은 사건들의 진상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고, 왜곡(歪曲)되었던 우리 역사의 상당 부분이 새롭게 재정립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정체성(正體性,identity)에 관련된 항일독립운동의 경우, 아직도 친일세력이 정계와 경제계는 물론 학계에도 많이 남아 있고, 이데올로기(ideology)에 의해 남북으로 국토가 분단되어 있는 등으로 해서 아직까지 그 실체마저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심지어는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일제강점기에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국내외에서 목숨을 걸고 항일독립투쟁을 전개했지만 그 사실을 입증할 증거를 제시하지 못해 아직도 보상을 받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고 하니 정말로 기가 막힐 따름이다.

 

다행히도 천안지역의 경우 이미 국가보훈처로부터 그 공적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아 정부 서훈(敍勳)이 추서된 독립운동가들 만도 무려 70여 명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유관순(柳寬順) 열사, 이동녕(李東寧) 선생, 조병옥(趙炳玉,1894-1960) 박사 등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독립지사들이 지역사회의 무관심으로 성역화사업이 지지부진하거나 행적과 사상에 대한 역사적 조명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그들의 유지와 업적이 제대로 선양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충남 최대의 항일독립만세운동인 기미년 4월 1일 아우내장터 항일독립만세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김구응(金球應,1887-1919), 조인원(趙仁元,1865-1932), 유중권(柳重權,1863-1919)과 그의 모친 이씨(李氏), 유중무(柳重武,1875-1956), 이백하(李栢夏,1899-1985), 이소제(李少悌,1875-1919), 이순구(李旬求,1892-1950), 조병호(趙炳鎬,1900-1973), 홍일선(洪鎰善), 김상훈(金相勳,1874-1925) 선생 등을 비롯한 48명의 애국지사들은 유관순(柳寬順, 1902.12.16-1920.9.28) 열사의 빛에 가려 공적이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 구제역(口蹄疫, foot and mouth disease) 파동으로 봉화제가 연기되거나 취소되고, 아우내장터 독립선언서가 실증사학(實證史學)의 포로가 되어 빛을 보지 못해, 기미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 항일독립정신이 잘 계승 발전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충청지역을 중심으로 향토의 역사와 문화를 조사연구하고 있는 향토사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무거운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아우내 장터 항일독립만세운동 98주년을 맞이하여 우선 먼저 아우내 장터 항일독립만세운동의 실체를 밝히고, 아우내 장터 독립선언서의 역사적 의의와 아우내 장터 항일독립정신의 창조적 계승방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아우내 장터 항일독립만세운동의 실체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벌어진 항일독립만세운동은 시장 군중 3,000여 명이 참여해 일제에 항거하며 항일독립만세를 불러 일경의 강력한 저지를 받았다.

 

일본 헌병과 경찰이 무차별적으로 총을 난사하고, 총검을 난자하여  김구응(金球應), 유중권(柳重權 : 유관순 열사의 부친), 이소제(李少悌 : 유관순 열사의 모친), 김상헌(金尙憲), 박병호(朴炳鎬), 박영학(朴永學), 박유복(朴有福), 박준규(朴俊圭), 방치성(方致成), 서병순(徐丙舜), 유중오(柳重五), 윤태영(尹泰英), 윤희천(尹熙千), 이성하(李星夏), 전치관(全致寬), 최정철(崔貞徹), 한상필(韓相弼) 등 무려 19명의 독립투사들이 목숨을 잃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했다.

 

이 항일독립만세운동은 홍일선(洪鎰善), 김교선(金敎善), 한동규(韓童圭), 이백하(李栢夏), 김상철(金相喆), 이순구(李旬求) 중심의 일파와 조인원(趙仁元), 유관순(柳寬順), 유중권(柳重權:유관순 열사의 부친), 유중무(柳重武 : 유관순 열사의 숙부), 조병호(趙炳鎬 : 조병옥 박사의 동생), 조만형(趙萬衡), 박봉래(朴鳳來) 중심의 일파들이 각각 독립운동을 준비하여 아우내 장터에서 합동으로 전개하였다.

 

▲     © 아산톱뉴스

 

오후 1시경 조인원(趙仁元) 선생이 아우내 장터에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웠다. 그리고 그가 태극기를 들고 시장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다음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유중무(柳重武), 유중권(柳重權), 조병호(趙炳鎬) 등이 함께 큰 소리로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러자 홍일선(洪鎰善), 김교선(金敎善), 백정운(白正云), 김상훈(金相勳) 등이 이에 가세하여 항일독립만세를 불렀고, 시위 군중들 또한 태극기를 흔들며 아우내시장을 행진하면서 계속 목이 터져라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때 아우내 장터에서 50보 정도 떨어져 있는 병천1리 289-5・6번지의 구장터에 위치해 있던 헌병주재소의 소산(小山) 소장 등 5명이 만세 소리에 깜짝 놀라 시위현장으로 출동하였다. 그들이 시위 군중을 향해 해산을 요구했으나 시위는 가라앉지 않고 계속 되었다. 그러자 일본 헌병들이 군중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을 발사하여 즉사 19명과 부상자 30명을 발생시켰다.

 

사상자의 친지들이 너무 분통하여 시신을 헌병주재소로 옮기고 항의를 계속하였다. 김교선(金敎善), 한동규(韓童圭), 이백하(李栢夏), 이순구(李旬求) 등도 시장 군중 100여 명을 이끌고 헌병주재소 앞으로 가서 주재 소장 고야마(小山)에게 사망자에 대한 조치와 유치장의 구금자 석방을 요구하며 태극기를 흔들며 격렬하게 시위를 하였다.

 

그러자 시장에 모여 있던 1500명의 군중들이 헌병주재소로 달려가 유리창을 깨고 격렬하게 항의 시위를 벌였다. 시위 군중들이 탄약함을 잡아당기고, 헌병 소장을 죽이라고 외치며 끌어내려고 하자 헌병들은 권총을 또 몇 발 발사했다. 이때 군중들 중 일부는 피신하고, 일부는 주재소의 다른 쪽으로 몰려갔다. 이틈을 이용해 일본 헌병들은 시신을 밖으로 내던졌다. 이에 흥분한 유중무(柳重武), 유관순(柳寬順), 김용이(金用伊), 조인원(趙仁元), 조병호(趙炳鎬) 등은 헌병 야마모토(山本), 헌병 상등병인 진상부(溱相部), 헌병 보조원인 맹성호(孟星鎬)와 정수영(鄭壽永) 등을 위협하고 윽박지르며 항의 시위를 계속 해 일본 헌병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그러나 아우내 장터 항일독립시위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20여 명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고 한다.

 

아우내 장터 독립선언서는 포함 이백하 선생이 기초     

 

1997년에 천안시가 발간한『천안시지』와 천안문화원이 1995년 8월 28일 발간한 민병달(閔丙達)․이원표(李元杓) 편저『천안독립운동사』에 의하면, 기미년 4.1일 아우내 장터에서 선언된 독립선언서는 유관순 열사가  파고다공원에서 개최된 3.1운동과 3월 5일 남대문 항일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은밀히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그대로 선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어느 독립운동사 관련 서적과 논문에서도 아우내 장터 독립만세운동을 누가 기획했는지, 자금은 누가 담당했는지 밝히지 못하고 있다.

 

▲     © 아산톱뉴스

 

그런데, 항일독립투사인 포암(逋巖) 이백하(李栢夏,1899-1985) 선생의 외아들인 고 이은창(李殷昌, 2002년 68세로 타계)씨가 1977년 7월 1일자로 작성해 국가보훈처에 제출한 <항일독립투사 이백하옹의 공적조서>에 의하면,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선언된 독립선언서는 천안시 성남면 석곡리 출생의 유림 대표인 이백하 선생이 구국동지회(救國同志會) 명으로 자체 제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아우내 장터 독립만세운동의 종합적인 기획은 이백하 선생이 맡았고, 자금 관계는 주로 유관순 열사의 숙부인 유중무(柳重武) 선생이 맡아 처리했다고 한다.

 

이 독립선언서는 기미년 3.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선언된 최남선(崔南善,1890-1957) 선생과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선사가 기초한 독립선언서가 너무 길고 난해하여 그것을 참고해 이백하 선생이 직접 초안, 미농괘지(美濃罫紙)에 수일간 철야 복사해 배부하고, 이백하 선생과 절친했던 조인원(趙仁元) 선생이 기미년 4.1일 오후 13시에 아우내 장터에서 낭독했다고 한다.

 

“2천만의 민족이 있고 3천리의 강토가 있고 5천년의 역사와 언어가 뚜렷한 우리는 민족자결주의를 기다리지 않고 원래 독립국임을 선포하노라.”로 시작되는 이 독립선언서에는 거사에 주민들을 많이 동원하기 위해 선동적인 언어가 많이 기술되어 있고, 우리 민족의 굳건한 항일독립의지와 기개가 실감나게 잘 나타나 있다.

 

포암(逋巖) 이백하(李栢夏) 선생은 1899년 천안시 성남면 석곡리에서 조선시대 말 대학자였던 오당(堂) 이상수(李象秀) 선생의 손자로 태어나 영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오송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그는 기미년 2월부터 고향에서 거사 움직임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거사에 전념하기 위해 교사직을 과감히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농업에 종사하면서 성남면 유림의 대표로 거사에 참가했다. 그는 유중무(柳重武), 조인원(趙仁元), 홍일선(洪鎰善), 김교선(金敎善), 한동규(韓童奎), 이순구(李旬求), 유관순(柳寬順) 등과 아우내장터 항일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돼 2년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해방 후 그는 충북의 충주중․청주고․청주여중, 서울의 서울여상 등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퇴직했다. 충주중 재직 시에 배출한 제자로는 이화여대와 연세대 석좌교수를 역임한 문학평론가 유종호(柳宗鎬, 81세)씨와 17대 충주시장과 충청북도 부지사를 역임한 홍순기(洪舜基, 85세)씨 등을 들 수 있고, 청주고 재직 시에 배출한 제자로는 충청북도 지사를 거쳐 내무장관과 국회 부의장을 역임한 김종호(金宗鎬, 80세)씨․농수산부장관과 정부장관과 충청대학장을 역임한 정종택(鄭宗澤, 80세)씨․14대 충주시장을 역임한 이상용(李相龍, 83세)씨․ 동국대 총장을 역임한 문학평론가 홍기삼(洪基三, 76세) 교수 등을 들 수 있다.

 

포암 이백하 선생은 결국 충주 교현동에서 학처럼 고결하게 여생을 보내다가 1985년에 86세를 일기로 타계해 그의 시신은 지금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독립선언서의 지역화는 역사적 의미 커

 

최근 필자가 3.1운동을 전문적으로 조사연구하고 있는 역사학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2017년 3월 29일 현재까지 기미년 3.1운동 당시 지방에서 독립선언서를 자체 기초해 선언한 것으로 밝혀진 곳은 경상남도의 함안(咸安)과 하동(河東)을 비롯해 3-4곳에 불과하다고 한다.

 

    

                                      아우내 장터 독립선언서

    

2천만의 민족이 있고 3천리의 강토가 있고 5천년의 역사와 언어가 뚜렷한 우리는 민족자결주의를 기다리지 않고 원래 독립국임을 선포하노라.

 

민족의 대표 33인이 선봉이 되었으니 13도 2천만 민중은 뒤를 이어 때를 잃지 말고 궐기하라. 분투하라. 인도 정의의  두 주먹으로 잔인무도한 일본의 총칼을 부수라.

 

정의의 칼날 앞에는 간악한 창과 방패가 굴복할 것이다.

 

하늘은 의로운 무리를 도울 것이며 귀신은 반드시 극악무도한 자를 멸할 것이니 동포여 염려할 것 없고 주저할 것 없이 오늘 정오를 기하여 병천 시장에 번득이는 태극기를 따르라. 모이라. 잃었던 국토를 다시 찾자. 기회를 놓지면 모든 복도 가느니 두 주먹을 힘차게 쥐고 화살같이 모이라.

 

반만년의 문화민족이 노예시 야만시 하는 일본의 굴욕을 감수할 것이랴.

    

                                              기미년 4월 1일

                                          구국동지회 대표 일동

 

그리하여 기미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선언된 이백하 선생이 기초한 독립선언서는 한국의 항일독립운동사상 아주 드문 사례로 그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클 뿐만 아니라 지역의 정체성(正體性,identity)을 밝히는 데에 아주 중요한 향토 사료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현재 충북 충주시 교현 2동에 거주하고 있는 이백하 선생의 며느리인 이순구(李淳九,68세)씨의 증언에 의하면, 유족 대표인 이백하 선생의 외아들인 고 이은창(李殷昌)씨가 1977년 7월 1일자로 공적조서를 작성하고 난 다음, 어처구니 없게도 그 원본들을 모두 버리는 바람에, 지금은 그 원본을 유족들도 구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하여 필자가 지난 10년 동안 그 원본과 구국동지회(救國同志會)의 실체를 찾아내기 위해 천안시내 골목과 대학 도서관 및 독립운동사연구소 등을 돌아다니며 백방으로 노력해

 

보았지만, 이미 세월이 많이 흘러 증언해 줄만한 사람들은 다 타계해 버리고 천안지역 3.1운동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도 거의 없어, 아직까지 그 정체를 정확히 밝히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 이루 말할 수 없다.

 

나가는 말

 

1919년 기미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벌어졌던 항일독립만세운동은 호서지방 최대의 항일독립만세운동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다.

 

특히 이화학당 재학 당시에 스승인 하란사(河蘭史, 본명 金蘭史, 1875-1919년)의 지도를 받아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선 유관순 열사가 김구용 목사와 이백하 선생의 지도를 받아 아우내 장터 항일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함으로써 초중고의 교과서에 한국의 대표적인 독립투사로 소개되어 한국의 잔 다르크(Jeanne d’Arc, 1412~1431)로 추앙받고 있다.

 

▲     ©아산톱뉴스

 

포암 이백하 선생이 기초하고 조인원 선생이 선언한 아우내 장터 독립선언서는 그 역사적 의미가 큰 만큼, 2008년에 조성된 기미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 항일독립만세운동 기념 공원의 기념탑에 순국자 19명의 명단과 함께 새겨 놓고, 민족의 성전인 목천 독립기념관과 천안박물관에 전시해 놓는가 하면, 해마다 봉화제 때 낭독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우내 장터 독립만세운동을 종합적으로 기획하고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이백하(李栢夏) 선생, 자금 관계를 맡아 처리한 유중무(柳重武) 선생,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조인원(趙仁元) 선생은 유관순 열사의 빛에 가려 공적이 잘 알려지지 않은 만큼 동상을 그 공원에 설립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또한 천안시청, 천안시 사적관리소, 천안․아우내․성환 문화원,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국가보훈처, 정부기록문서보존소, 천안교육청 등 유관 기관은 행정력을 총동원해 이백하 선생이 기초한 독립선언서 원본을 찾아 문화재로 지정하고, 구국동지회(救國同志會)의 실체를 밝히는 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을 통해 아우내 장터 항일독립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천안지역 학생들을 대상으로 아우내 장터 현장체험학습을 전개하고, 해마다 3.1일 개최되는 봉화제에 적극 참여하도록 홍보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극일정신을 배양하도록 하는가 하면, 망향의 동산・독립기념관・아우내 장터 항일독립만세운동 기념공원․유관순 열사 유적지・상록리조트 등과 연계하여 관광지로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 소개>

 

▲ 신상구 박사.     ©아산톱뉴스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문학평론가)

 

-출생: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학력: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경력: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아우내 단오축제>, <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 <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4권. 

 

-주요 논문: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체의 현황과 과제”, “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 등 67편.

 

-수상 실적: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시부문 신인작품상, <한비문학>·<오늘의문학> 평론부문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활동: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기사입력: 2017/03/29 [18:23]  최종편집: ⓒ 아산톱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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