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최고의 과학기술자 장영실의 생애와 업적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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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 장영실을 재조명하는 사업 인기 절정    

 

장영실(蔣英實, 1390년경-?)은 <조선왕조실록>과 현행 과학 교과서에도 나올 정도로 유명한 조선 전기 최고의 과학가술자임에도 불구하고 양반이 아닌 까닭에 아직까지 생몰연대도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다행히도 요즈음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천재 궁중기술자 장영실을 추모하고 재조명하는 작업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장영실을 주인공으로 한 한국 최초의 과학드라마인 KBS TV 사극 ‘장영실’은 시청률이 이미 14%를 넘어섰고, 과학자가 참여하는 토크쇼 형태의 KBS TV프로그램 <궁금한 일요일 장영실쇼>도 시청자들의 인기를 얻고 있다.

 

장영실을 다룬 소설·뮤지컬·위인전기도 여러 편 나왔다. 획기적인 다양한 천체관측기구의 발명으로 태종과 세종의 총애를 받아 천민 신분에서 상의원 별좌, 정4품 호군, 종3품 대호군까지 오른 장영실의 드라마틱한 삶이 일반인의 관심과 흥미를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

 

장영실의 삶과 업적이 재조명되면서 장영실 관련 지방자치단체들의 장영실 마케팅 열기도 덩달아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장영실의 본관이자 가묘가 있는 충남 아산시는 장영실 기념사업회와 함께 매년 10월 26일을 ‘장영실의 날’로 정해 축제를 열면서 과학정신을 기리고 있다.

 

2011년에는 장영실 과학관을 개관했고 애니메이션도 제작했다. 동래현 관노였다는 기록에 근거해 부산시도 2009년 장영실 과학동산을 조성해 조선시대 과학기구를 전시하고 있다.

 

2. 과학기술 명문가에서 태어난 천재 궁중기술자 장영실

 

▲ 조선시대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 영정.     © 아산톱뉴스

 

조선 전기 천재 궁중기술자였던 장영실(蔣英實)은 1390년경 과학기술의 명문가인 아산장씨(牙山蔣氏) 문중에서 부친 장성휘(蔣成暉)와 모친 기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천민 출신임에도 과학기술에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어 태종과 세종의 눈에 들어 관비로 중국 유학까지 다녀온 조선시대 최고의 과학기술자였다. 당대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과학을 위해 태어난 인물’이라 칭송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장영실의 조상은 원나라의 소주(蘇州)와 항주(杭州) 출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려에 귀화하여 아산군(牙山君)에 봉해졌던 장서(蔣壻)의 9대 손이며, 그의 집안은 고려 때부터 대대로 과학기술분야 고위관직을 역임하였다.

 

장영실의 부친 장성휘 5형제는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이들 5형제는 모두 전서(典書) 벼슬을 지냈다. 전서는 고려후기와 조선 초기 정3품 장관직이다.

 

이들이 태어난 경북 의성군 점곡면 송내리 교동은 5전서의 마을로 불린다. 장성휘의 묘소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다른 네 형제의 묘는 의성·안동·의흥 등지에 남아 있다.

 

3. 명재상 맹사성과 세종의 직언으로 교수형 직전에 목숨을 구함

 

장영실의 신분은 동래현(東萊縣)의 관노(官奴)였다. 그는 천대를 받으면서도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 1367-1422)과 절친했던 부친 장성휘(蔣成暉)와 사촌매제인 무송헌(撫松軒) 김담(金淡, 1416-1464)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천문 관측을 계속하여 별자리의 운행 질서를 과학적으로 밝혔다.

 

그리고 고구려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를 1395년(태조 4)에 서운관의 천문학자 12명이 돌에 새겨놓은 석각 천상열차분야지도에 숨겨 있는 비밀을 알아내는 등으로 과학 기술에 천재성을 발휘했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천문 기밀을 누설했다는 죄목으로 태종의 명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질 운명에 처해 있었는데, 아산 출신의 명재상 맹사성(孟思誠, 1360-1438)과 세자인 세종(世宗) 도(祹, 1397-1450)의 목숨을 건 직언(直言)으로 교수형 집행과정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그 후 과학적 재능이 뛰어나 하늘의 별똥별 현상을 과학적으로 밝혀내고 새로운 천체기구를 계속 발명함에 따라 태종에 의해 발탁되어 궁중기술자 업무에 종사하였다.

 

제련(製鍊), 축성(築城), 농기구와 무기의 제작과 수리, 천체 관측기구 제작 기술에 뛰어나 1421년(세종 3)에 세종의 명으로 윤사웅, 최천구와 함께 중국으로 유학하여 각종 천문기구를 익히고 돌아왔다.

 

1423년(세종 5)에는 왕의 특명으로 면천(免賤)되어 정5품 상의원(尙衣院) 별좌(別坐)가 되면서 관노(官奴)의 신분을 벗었고, 궁정기술자로 역할을 하였다. 상의원(尙衣院)은 왕의 의복과 궁중에서 사용하는 물품을 담당하는 기관이었고, 별좌는 종5품의 문반직이었지만 월급은 없는 무록관(無祿官)이었다.

 

장영실이 상의원 별좌 자리에 오르게 되기까지에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장영실에게 상의원 별좌라는 관직을 주려 했던 세종은 이 문제를 이조판서였던 허조(許稠)와 병조판서였던 조말생(趙末生)과 의논했다. 이 논의에서 허조는 “기생의 소생을 상의원에 임용할 수 없다”며 반대했고, 조말생은 “가능하다”라고 했다. 두 대신 간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자 세종은 재차 다른 대신들을 불러 이 문제를 상의했는데, 대신 중에 유정현이 “상의원에 임명할 수 있다”라고 하자 곧바로 장영실을 상의원 별좌로 임명했다.

 

4. 세종의 총애로 고위 관직에 올라 수많은 천체관측기구 발명 

 

장영실은 세종의 총애를 받아 행사직(行司直)이 되었고, 1432년에는 중추원사 이천(李狀)을 도와 간의대(簡儀臺) 제작에 착수하고 각종 천문의(天文儀) 제작을 감독하였다.

 

장영실이 자격루 제작에 성공하자 세종은 공로를 치하하고자 정4품 벼슬인 호군(護軍)의 관직을 내려주려 했는데, 이때도 논란이 많았다. 그러나 청백리인 황희(黃喜, 1363-1452)가 “김인이라는 자가 평양의 관노였으나 날래고 용맹하여 태종께서 호군을 특별히 제수하신 적이 있으니, 유독 장영실만 안 된다고 할 수 없다”라고 하자 세종은 1433년(세종 15) 장영실에게 정4품 호군(護軍)이라는 관직을 내렸다.

 

▲ 국보 229호인 보루각 자격루.     © 아산톱뉴스

 

그러자 장영실은 혼천의(渾天儀) 제작에 착수하여 1년 만에 완성하였다. 그 이듬해 동활자(銅活字)인 경자자(庚子字)의 결함을 보완한 금속활자 갑인자(甲寅字)의 주조를 지휘 감독하였으며, 당시 세종과 정인지, 정초 등이 조사하고 수집한 자료를 가지고 문헌에 전하는 소송의 물시계와 이슬람 물시계를 비교하면서 한국 최초의 물시계인 보루각(報漏閣)의 ‘자격루(自擊漏)’라는 새로운 자동 물시계를 만들어냈다.

 

1437년부터 6년 동안 천체관측용 대·소간의(大小簡儀), 휴대용 해시계 현주일구(懸珠日晷)와 천평(天平)일구, 고정된 정남(定南)일구, 앙부(仰釜)일구, 주야(晝夜) 겸용의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태양의 고도와 출몰을 측정하는 규표(圭表), 자격루의 일종인 흠경각(欽敬閣)의 옥루(玉漏)를 제작 완성하고 경상도 채방(採訪)별감이 되어 구리(銅)·철(鐵)의 채광·제련을 감독하였다.

 

1441년에는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와 수표(水標)를 발명하여 하천의 범람을 미리 알 수 있게 했다. 그 공으로 상호군(上護軍)에 특진되었다.

 

5. 가마 붕괴 사건에 연루되어 곤장 80대를 맞고 파직 당함

 

1442년(세종 24년)에 장영실은 세종이 신병치료차 이천으로 온천욕을 떠나는 길에 탈 가마를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 장영실의 임무는 제작 감독이었다. 그러나 그 가마는 세종이 타기도 전에 부서져 버렸다.

 

사헌부에서는 왕이 다친 것은 아니었으나 안위와 관련된 일이므로 장영실을 비롯한 참여자들은 불경죄로 관직에서 파면되는 것은 물론이고, 아울러 곤장까지 맞아야 한다고 했다.

 

사헌부의 탄핵이 올라오자 세종은 망설이다가 형벌을 내리기로 결정했는데, 그토록 총애하던 장영실에 대해 배려해 준 것이라고는 곤장 100대의 형을 80대로 감해 주었을 뿐이었다. 과거 그의 실수에도 과감히 눈감아준 전력과는 차이가 있다.

 

장영실은 곤장 80대를 맞고 1442년에 대호군 자리에서 파직당하였다. 그 뒤 장영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그간 세종의 남다른 관심과 장영실의 재주 등을 고려해볼 때 장영실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이에 대해 간의대 사업으로 인한 명나라와의 외교 문제로부터 장영실을 보호하려 했다는 주장과 천문의기 프로젝트가 끝나버려 장영실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는 주장 등 여러 견해가 있지만 신빙성 있는 주장들은 아니다.

 

장영실이 공직에서 물러난 후의 행적은 현재까지 베일에 가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말년을 보낸 곳은 본관인 아산이 아니라 일가들이 모여 살던 의성일 것으로 추측하는 사람이 많다.

 

실록에는 장영실이 경상도 ‘채감별감’으로 나가 영해·청송·의성 등 각 읍에서 생산된 철과 동을 바쳤다는 기록도 나온다.

 

6. 추모사업으로 장영실 동상과 장영실과학관 건립 

 

동래현 관노로 알려진 그가 어디서 어떤 교육을 받았기에 15세기 최고의 공학자로 발돋움할 수 있었을까?.

 

미스터리한 그의 일생에서의 실마리는 건국대 남문현 교수에 의해 일부 풀렸다. 세종 때 영주 출신 조선 최고의 천문학자 무송헌(撫松軒) 김담(金淡, 1416-1464)이 장영실의 4촌매제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김담은 태종 16년 영주의 삼판서 고택에서 태어나 47세에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이순지와 함께 당시 국립천문대에 해당하는 간의대에서 천체를 관측하고 <칠정산(七政算)> 내편과 <칠정산> 외편 등 수많은 천문·역서를 편찬했다. 칠정산은 중국의 베이징이 아닌 한양을 기준으로 제작한 우리나라 최초의 자주적 역법으로 그 의미가 크다. 장영실이 동래현 관노였지만, 천문학에 대한 기본적인 식견을 쌓을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집안 배경이 작용했을 것이다.

 

아무튼 장영실이 한국 과학사에 남긴 뛰어난 업적으로 보아 만약 장열실이 지금 태어났더라면 국민들이 목말라 하는 노벨과학상을 수상할 가능성이 아주 높은 천재 과학자였던 것 같다.

 

과학에 흥미와 재주가 있는 신동(神童)들이 KBS TV 과학드라마 <장영실>을 보고 노벨과학상에 도전하여 노벨과학상을 국민들에게 안겨주기를 2016년 병신년(丙申年) 새해에 기원해 본다.    

 

▲ 천안아산역 광장에 건립된 장영실의 동상.     © 아산톱뉴스

 

다행히도 2016년 병신년(丙申年) 새해에 태어나는 신생아들은 붉은 원숭이띠로 원숭이처럼 영리하고, 재주가 뛰어나 천재과학자 장영실처럼 세계 최초의 발명품들을 많이 만들어 내어 과학 한국을 선도하고, 노벨과학상을 수상하여 한국 국민들의 노벨과학상에 대한 한(恨)을 풀어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 아산 장영실과학관 전경.     © 아산톱뉴스

 

2011년 7월22일 충남 아산시 실옥로 220에 장영실 과학관이 건립되었고, 천안아산역에는 장영실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아산 장영실과학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의 현대식 대형 건물로 시민들에게 기초과학시설을 제공하고, 과학교육 및 기획전시 등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아산 장영실과학관은 조선시대 실용과학에 기여한 천재 발명가이자, 아산이 가계 본관인 ‘장영실’을 아산시의 브랜드 및 한국과학기술교육의 아이콘을 정립하는 데에 기여하여 아산시의 발전은 물론 한국 과학기술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참고문헌>

1.<세종실록>권 65 <보루각기> 세종 16년 7월 1일 조, 1434.

2. 남문연, <자영실과 자격루>,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2. 12. 3.

3. 박성래, <인물과학사>, 책과함께, 2011. 11. 30.

4. ‘장영실(蔣英實)’, 네이버 두산백과, 2016. 1. 23.

5. 정성희, <장영실-조선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 테마관, 네이버 지식백과, 2016. 1. 25.

6. ‘무송헌 김담’, 위키백과, 2016. 1. 25.

7. 아산 장영실과학관 홈페이지 참조.

8. KBS TV 과학드라마 <장영실> 참조.

9. 배재석, ‘장영실과 김담’, 영남일보, 2016. 1. 25일자.

 

<필자 소개>

 

▲ © 아산톱뉴스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향토사학자/시인/칼럼니스트)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A study of Korean inflation, 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A study of shamanic culture in Taean, 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아우내 단오축제> 등 4권

 

-주요 논문: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58편.

 

-수상 실적: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이력: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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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01/26 [20:33]  최종편집: ⓒ 아산톱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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