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절망에 빠진 30대를 구할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누구일까?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후배들을 보면서 이는 우리들 50대와 60대의 책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치가는 돈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만을 듣고 또 서민들은 어려우면서도 화려함을 쫓는 무심함 때문에 이처럼 고통스러운 시절을 맞이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보도는 “절망의 30대 '허니문 푸어(honeymoon poor)' 늪에 빠지다”라는 제목 하에 고통에 빠진 후배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치솟는 전세 값과 살인적인 결혼 비용 탓에 결혼 시작부터 빚더미에 오르는 젊은 부부들이 크게 늘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 기사를 인용해 보자.
결혼과 동시에 예기치 못하게 가난의 굴레를 뒤집어쓴다면 어떤 기분일까? "결혼하기 전에는 사실 여유가 있었다. 결혼하고 나니 먹고 살기 힘들고 놀러나가는 건 꿈도 못 꾸고 생활자체가 피폐해졌어요." 평범한 직장인인 고모씨(36살, 경기)는 결혼을 위해 4천만 원의 대출을 받은 뒤 빚이 갈수록 늘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소연한다.결혼 비용 마련만 해도 사회초년생 부부의 등골이 휠 지경인데, 2년마다 재계약해야 하는 전세 값이 폭등한 요즘은 젊은 부부들의 근심은 말 그대로 태산이다. 2년 전 결혼을 하며 9천만 원짜리 전세를 구했던 신혼부부인 정모씨(32살, 서울)는 올해 4천만 원이나 올라버린 전세 값에 돈을 구하지 못했다. 전세 값 마련 압박감에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는 정 씨는 결국 아내와 처가살이를 결심했다. 최근 젊은 부부들이 흔들리고 있다. 88만원 세대와 등록금 천만원 시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갈 정도라는 취업난을 힘겹게 헤쳐 나왔더니 또 한 번의 난관인 허니문푸어가 기다리고 있다. '허니문푸어'란 결혼 비용이 폭등하면서 결혼으로 큰 빚을 지게 되는 젊은 부부들이 가난의 굴레를 지게 되는 현상이다.한 결혼업체에 따르면 올해 서울의 경우 예비신랑 신부가 예상하는 결혼 추정 비용은 2억 원이라고 한다. 이는 초년 직장인이 6년을 꼬박 모아야 모을 수 있는 거액이다. 결국 살인적인 결혼비용 때문에 결혼하면서 빈곤의 덫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지난 12일 통계청이 발표한 2011년 가계수지동향에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젊은 부부가 대부분인 30대 가정의 부채비율이 22.2%에 달하는 높은 수준으로 이 비율은 모든 연령대를 앞질렀다.
취업난과 월세 등으로 경제난을 겪는 20대 가구주의 부채비율이 15.3%임을 고려하면, 본격적으로 결혼하게 되는 30대가 신혼집 마련과 결혼비용 부담에 빚더미에 오르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때문에 부모의 도움이 없다면 웬만한 연봉의 대기업 직장인도 경제적 어려움에서 예외가 아니다. 올해 결혼한 대기업 직장인 이 모(34·서울) 씨는 “아이는 엄두도 못 낸다”며 “알만한 회사에 다녀도 경제적으로 힘이 드는데 연봉이 낮거나 직장이 불안한 신혼부부들은 어떻게 생활을 하는지 상상이 안 간다”고 말했다.
금융 대기업 직장인 임 모(33·경기) 씨는 “신혼집 마련으로 대출을 받았는데 갑자기 빚이 크게 생겨서 외식이나 취미생활은 이제 총각 때 이야기”라며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많이 힘들 때가 많다”고 한숨을 쉬었다.
아슬아슬한 결혼생활, 젊은 가장이 자칫 실직이라도 하게 되면 더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더 좋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 다니고 공무원 시험에 뛰어드는 젊은 가장의 경우도 늘고 있어 이 경우 허니문푸어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된다.
이 같은 고통에 대해서는 한나라당과 민주당, 그리고 노동당에서도 전혀 관심이 없다. 도대체 정치라는 것은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일까? 그토록 고생해서 신혼생활을 시작해도 또다시 애들 과외공부, 사교육비용으로 고통을 받아야 하는 우리나라가 과연 애국할 수 있는 나라인가? 아니면 망해야 하는 나라인가?
지금 고통을 받고 있는 신혼부부들은 최소한 박정희에 대해서 감사해야 한다. 만약에 박정희가 살아 있다면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까지 그대로 두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사망한 후 여러 대통령이 있었지만 서민들의 결혼식 비용까지 신경 써준 대통령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박정희는 우리 사회의 허례허식이 어떤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가정의례준칙을 만들었다. 예식장에서는 절대로 음식들 답례로 해서는 안 된다. 약혼선물은 어떻게 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을 구질구질하게 꼼꼼하게 적었다. 하루아침에 우리사회의 전통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지도자로서 박정희는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사회의 허례허식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고 그러다 보면 서민들은 가진 사람의 뒤를 쫓아다니다가 결국은 파산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혼례와 장례를 치루는 기준을 엄격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시행하려니 정말이지 많은 저항이 있었다. 가진 사람들의 저항이 많았고 그러한 저항에 서민들도 멋모르고 가세했다. 박정희는 외로워졌다. 그러나 그는 죽는 날까지 서민들을 위한 가정의례준칙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게 바로 서민을 살리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서민들의 경제를 좀먹는 허례허식을 끝장내야 하는 게 자기의 사명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젊은이들은 무조건 박정희를 멀리하고 있다. 그를 독재자라고 부르는 일부 과격인사들에 의해서 조종되고 있다. 그러나 박정희 시대에 야당인사들과 지식인들은 모두 그의 시대에 그를 독재자라고 불렀다. 독재자를 독재자라고 부르는 체재는 결코 독재가 아니다. 언론이 그만큼 자유로웠다. 정치인들도 최소한 박정희를 독재가 박정희라고 부를 수 있었다. 윤보선 대통령은 평생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부른 일이 없다. 그를 항상 ‘박정희 씨’라고 불렀다.
나는 박정희 이후의 대통령은 국민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정신이 없었던 인간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최소한 그는 국민들을 비위를 맞추려 하지 않았다. 그는 국민들이 잘못하는 것을 지적했다. 국가가 잘못되어 나가는 것을 참고 보지 못했다. 그는 국민들에게 올바른 이야기를 하였고 국가가 잘못되어 나가는 것을 보고서는 그걸 뜯어 고쳤다.
가정의례준칙을 그대로 시행하였다면 지금 우리사회는 젊은이들이 결혼식 비용 때문에 허덕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누가 더 혼수감을 화려하게 준비하느냐 하는 문제로 싸우고 헤어지는 그 참담한 현실은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저축률은 세계에서 제일이었다. 국민들이 쓸데없는 곳에 돈을 쓰지 못하도록 지도하고 앞장선 박정희 덕분이었다. 지금 우리나라의 저축률은 세계에서도 꼴찌에 가까울 것이다. 무엇이 우리들 이렇게 만들었는가?
박정희를 욕만 하고 국민의 비위나 맞추고 국가가 잘못돼 가는 것을 알고도 팔짱만 끼고 있었던 그 무능한 대통령 때문이다. 그 대표야 장수를 누리고 계시는 김영삼 대통령이지만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물론 이명박 대통령도 예외일 수 없다.
나는 감히 말한다. 젊은이들이여! 일자리에 고민하고 결혼하고 고민하고 결혼하지도 못하는 젊은이들이여! 먹물들에게 속아서는 안 된다. 서민들에게 희망과 꿈을 준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뿐이었다. 먹물들이 즐겨 부르던 독재자 박정희 시대에 우리들에게는 꿈과 희망이 있었다.
정인봉 본지 칼럼위원
<필자 소개> 정인봉
<학력> -경기고등학교 졸 -서울대 법과대학 졸
<이력> -제17회 사법고시 합격 (1975년) -서울북부지방법원 판사 역임 -현 변호사 활동 중 -법률 무료상담소 운영 (1990년∼현재) -중학교 무상의무교육 최초 헌법소원 제출, 서명운동 주도 (1999년) -한나라당 제 16대 종로구 국회의원 당선 (2000년) -방송통신대학교 영문, 중문, 불문학과 졸업 (1997~현재 국문학과 재학) -중학교 무상의무교육 관철 (2003년) -한나라당 인권위원장 (2005~2006년) -신문악법 소송 승소 (2006년) -박근혜 전 대표 법률특보 (대통령 경선 2007년)
<저서> ▲그래도 골목에는 꿈이 있다 ▲처리더쉽 (번역) ▲특허법개론 ▲세월을 담는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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